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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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부 전선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인 독일과 연합군이 격돌한 주요 전선으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벨기에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를 침공하며 프랑스 침공을 시도했으나,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이후 참호전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베르됭 전투, 솜 전투 등 대규모 전투에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1917년 미국이 참전하고, 1918년 독일의 춘계 공세가 실패하면서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서부 전선은 항공전, 화학전 등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보여주었으며, 독일의 패배와 베르사유 조약 체결,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부 전선은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시작되었다. 독일 제국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여 프랑스 북동부 공업 지역을 장악하려 했으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프랑스군 섬멸에 실패하고 전선을 후퇴, 재정비하였다. 이후 스위스에서 영국 해협에 이르는 전선이 구축되었고, 양측에는 참호가 만들어졌다. 이 전선은 전쟁 기간 대부분 큰 변화가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 전선에는 동맹국과 연합국 양 진영이 참전했다.
2. 역사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양측은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펼쳤으나, 참호선에 배치된 기관총, 철조망 등으로 인해 방어 측이 유리하여 공격 측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1916년에는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가 있었지만, 양측 모두 큰 피해만 입고 전황의 결정적인 전환에는 이르지 못했다. 기관포, 독가스, 전차, 비행기 등 신병기가 도입되었으나, 결정적인 우위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1918년에는 독일군의 춘계 대공세(카이저슐라흐트) 실패와 미국군의 참전 등으로 연합군이 전력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독일군 사령부는 패배를 인식하고, 11월 독일 정부는 휴전 협정을 수락했다.
2. 1. 1914년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제국은 7월 30일, 독일 제국은 8월 1일, 오스트리아는 8월 4일에 각각 총동원을 명령하였다.
독일군은 즉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하여 프랑스 북동부 공업 지역을 장악하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파리 근교까지 진격한 독일군은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여 프랑스군 섬멸에 실패하고 전선을 후퇴, 재정비하였다. 이후 스위스에서 영국 해협에 이르는 전선이 구축되었고, 양측 전선에는 참호가 구축되었다. 이 전선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대부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서부 전선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독일과 프랑스 군대가 맞붙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승패가 결정된 곳이다.[2] 전쟁 발발 당시, 서부에 7개 야전군, 동부에 1개 야전군을 보유한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의 수정된 버전을 실행하여, 중립국 벨기에를 통해 신속하게 이동하여 국경을 따라 있는 프랑스 방어선을 우회한 다음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프랑스를 공격하고 프랑스군을 포위하여 독일 국경에 몰아넣으려 했다.[3]
독일군은 파리 근처까지 접근했지만, 마른 전투 제1차(9월 6일~12일)에서 프랑스와 영국군은 제1군과 제2군 사이에 나타난 틈을 이용하여 독일군의 후퇴를 강제함으로써 프랑스로의 독일군 진격을 종식시켰다.[12] 독일군은 에인 강 북쪽으로 후퇴하여 참호를 구축하고, 향후 3년 동안 지속될 정적인 서부 전선의 시작을 알렸다. 이 독일군의 후퇴 이후, 양측 세력은 바다를 향한 경쟁으로 알려진 상호 측면 기동을 수행했고, 스위스 국경에서 북해까지 참호 체계를 신속하게 확장했다.[9]
2. 1. 1. 슐리펜 계획
1839년 런던 조약에 따라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했던 영국은 1914년 8월 4일 자정 최후통첩 만료 시점에 전쟁에 참전했다. 독일군은 1914년 8월 4일 벨기에를 공격했다. 룩셈부르크는 8월 2일 저항 없이 점령되었다. 벨기에에서의 첫 전투는 8월 5일부터 16일까지 지속된 리에주 전투였다. 리에주는 요새화가 잘 되어 있었으나, 독일 중화기는 며칠 만에 주요 요새를 파괴할 수 있었다.[3] 리에주 함락 후, 벨기에 야전군 대부분은 앤트워프로 이동했고, 나뮈르 주둔군은 고립되었으며, 벨기에 수도 브뤼셀은 8월 20일 독일군에게 함락되었다. 나뮈르 공방전은 8월 20일부터 23일까지 지속되었다.[4]
프랑스는 국경에 5개 군대를 배치했는데, 프랑스의 제17호 작전 계획은 알자스-로렌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었다.[5] 8월 7일, 제7군단은 뮐루즈와 콜마르를 점령하기 위해 알자스를 공격했다. 주요 공세는 8월 14일에 시작되었고, 제1군과 제2군은 로렌의 사르부르-모랑주를 향해 공격했다.[6] 슐리펜 계획에 따라 독일군은 천천히 후퇴하면서 프랑스군에게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 프랑스 제3군과 제4군은 자르강으로 진격하여 자르부르크를 점령하려 했고, 브리에와 뇌프샤토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7] 프랑스 제7군단은 8월 7일과 8월 23일에 짧은 교전 후 뮐루즈를 점령했지만, 독일 예비군이 뮐루즈 전투에서 그들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은 두 번이나 후퇴해야 했다.[8]
독일군은 벨기에를 휩쓸며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파괴했다. 신문들은 독일의 침략, 민간인에 대한 폭력, 재산 파괴를 비난했고, 이는 "벨기에 강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0] 벨기에, 룩셈부르크, 아르덴을 통과한 후, 독일군은 8월 말 프랑스 북부로 진격하여 조제프 조프르 휘하의 프랑스군과 존 프렌치 경 휘하의 영국 원정군 사단과 만났다. 국경 전투로 알려진 일련의 교전이 발생했는데, 여기에는 샤를루아 전투와 몽 전투가 포함되었다. 전자 전투에서 프랑스 제5군은 독일 제2군과 제3군에 의해 거의 궤멸되었고, 후자는 독일군의 진격을 하루 지연시켰다. 일반적인 협상국군의 후퇴가 이어졌고, 르 카토 전투, 모보주 공방전, 그리고 생캉탱 전투(기즈 제1차 전투라고도 함)에서 더 많은 충돌이 발생했다.[11]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독일 육군은 서방 열강의 공세에 대비하여, 헬무트 폰 몰트케에 의해 일부 수정된 슐리펜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전쟁 발발 직후 벨기에를 경유하여 프랑스 북동부로 진입한 뒤,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군을 익포위하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룩셈부르크와 벨기에의 저항을 분쇄하면서 진격하여 8월 하순 프랑스 북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조제프 조프르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존 프렌치가 이끄는 영국 원정군(BEF)을 만나 국경 전투가 발생했다. 샤를루아 전투와 몽 전투 등 초기 전투에서 패배한 연합군은 후퇴했다. 르 카토 전투, 모부주 포위전, 기즈 전투(생캉탱 전투) 등의 전투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군은 파리까지 70km 지점까지 도달했지만, 9월 6일부터 12일까지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진격이 멈췄다.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반격에 나선 (제1차 앵 전투) 프랑스군에 의해 독일군은 앵강 방어선까지 후퇴했고, 그곳에 참호를 구축하여 방어에 들어갔다. 초기 전투에서 공격측의 불리함을 깨달았던 프랑스군도 이를 보고 진격을 멈췄다. 이렇게 해서 그 후 3년 동안 지속되는 서부 전선이 구축되게 되었다.
적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양군은 북쪽으로 측면 기동을 시작했고, 그 결과 “해상 경쟁”에 의해 스위스에서 영국 해협에 이르는 참호선이 형성되었다.[9]
2. 1. 2. 벨기에 침공
헬무트 폰 몰트케가 지휘하는 독일 참모 본부는 1905년 알프레드 폰 슐리펜 백작이 작성한 슐리펜 계획을 바탕으로 벨기에를 침공했다. 이 계획은 7개 군 병력을 투입하여 서부 전선에 공세를 취하고, 그중 2개 군은 중립국인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벨기에 국경선을 돌파하여 파리 남쪽으로 돌아 프랑스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1914년 8월 4일, 알렉산더 폰 클럭과 카를 폰 뷜로가 이끄는 독일 제1군과 제2군은 벨기에를 침공했다. 룩셈부르크는 8월 2일에 저항 없이 점령되었다. 벨기에에서의 첫 번째 전투는 8월 5일부터 16일까지 지속된 리에주 전투였다. 리에주는 요새화가 잘 되어 있었지만, 독일 중화기는 며칠 만에 주요 요새를 파괴했다. 리에주 함락 후, 벨기에 야전군 대부분은 후퇴하여 앤트워프로 이동했고, 나뮈르 주둔군은 고립되었으며, 벨기에 수도 브뤼셀은 8월 20일 독일군에게 함락되었다. 독일군은 앤트워프를 우회했지만, 나뮈르 공방전이 8월 20일부터 23일까지 이어졌다.
벨기에의 중립은 1839년 런던 조약에 따라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보장되었다.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는 8월 2일 각료회의에서 "벨기에는 길이 아니다. 국가다"라고 말하며 중립국으로서 독일군의 통행권을 거부했다.
독일군 총동원이 진행 중이던 8월 5일, 독일군 특수부대가 리에주에 있는 벨기에 국경 요새를 공격했다. 이틀 후 시와 내성은 함락되었지만, 벨기에 방어 부대는 외곽 요새에서 항전하며 투항을 거부했다. 독일군은 거포를 동원한 포격으로 외곽 요새를 하나씩 파괴했고, 8월 16일 최후의 요새가 함락되었다. 리에주를 통과하는 도로가 뚫리자 독일군은 벨기에로 진입했다. 벨기에의 잔여 병력은 독일 공격군의 외곽선 밖으로 후퇴하여 안트베르펀 주위에 포진했다.
벨기에군의 저항은 독일군에게 예상 밖이었고, 이 지연은 슐리펜 계획에 혼란을 초래했다.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군의 동원력 지연을 전제로, 러시아군이 동원을 완료하기 전에 서부전선의 영불군을 신속히 격파해야 했다. 벨기에 군민이 국내 철도망을 파괴하여, 슐리펜 계획에 기반한 좌익에서 우익으로의 수송이 어려워졌다.
독일군은 벨기에를 휩쓸며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파괴했다. 이는 "벨기에 강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 1. 3. 프랑스 침공
헬무트 폰 몰트케가 지휘하는 독일 참모 본부는 1905년 알프레드 폰 슐리펜 백작이 작성한 청사진을 바탕으로 7개 군 병력을 투입하여 서부 전선에 공세를 취하는 작전 계획을 갖고 있었다.[8] 이 작전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8월 5일 독일군 특수부대가 리에지에 있는 벨기에 국경 요새를 공격했다. 이틀 후 시와 내성은 함락되었지만, 벨기에 방어 부대는 외곽 요새에서 항전하며 투항을 거부했다. 독일군은 거포를 동원한 포격으로 외곽 요새를 하나씩 파괴했고, 8월 16일 최후의 요새가 함락되었다.[8]
리에지를 통과하는 도로가 뚫리자 독일군은 벨기에로 진입했다. 벨기에 잔여 병력은 독일 공격군 외곽으로 후퇴하여 안트베르펀 주위에 포진했다.[8]
한편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셉 조프르 대장은 5개 군을 전선에 배치했다. 그중 4개 군은 알자스-로렌 지방의 메츠-티온빌 요새 진지 북쪽과 남쪽에서 독일군에 대한 공세를 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1개 군은 예비 병력으로, 공격 성공 시 전과를 확대하거나 독일군이 벨기에로 침공할 경우 전선을 북쪽으로 연장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었다.[8]
조프르는 독일군 주력이 알자스-로렌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확신하여 벨기에에 적 대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에 즉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8월 15일 제5군에게 명령을 내려 상브르강과 뫼즈강 사이 벨기에 국경 지대에 포진하도록 했다. 8월 20일 르카토 지역에는 존 프렌치경 휘하의 소수정예 영국 원정군(BEF)이 도착했다. 조프르는 독일군에 대한 양국군의 협동 공격을 명했지만, 독일 우익군 병력을 과소평가하여 독일군 진격은 저지되지 못했다.[8]
8월 14일 시작된 공격에서 로렌의 사르부르와 알자스의 뮐루즈가 제1 목표였다.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군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면서 점진적으로 후퇴했다. 프랑스군은 뮐루즈를 점령하고 사르부르까지 진격했으나, 프랑스 북동부에서의 대패로 인해 퇴각해야 했다.[8]
독일군은 룩셈부르크와 벨기에의 저항을 분쇄하며 계속 진격했다. 8월 하순 독일군 부대는 프랑스 북부에 도착했고, 조제프 조프르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존 프렌치가 이끄는 영국 원정군(BEF)을 만나 국경 전투가 발생했다. 샤를루아 전투와 몽 전투 등 초기 전투에서 패배한 연합군은 후퇴했다.[9]
르 카토 전투, 모부주 공방전, 기즈 전투(생캉탱 전투) 등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군은 파리까지 70km 지점까지 도달했지만, 9월 6일부터 12일까지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진격이 멈췄다.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반격에 나선 제1차 앵 전투 프랑스군에 의해 독일군은 앵강 방어선까지 후퇴했고, 그곳에 참호를 구축하여 방어에 들어갔다. 초기 전투에서 공격측의 불리함을 깨달았던 프랑스군도 진격을 멈췄다.[9]
2. 1. 4. 해전
대영 제국과 독일 제국은 제해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전쟁 시작 첫 주 지중해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 제국 해군성은 전투 순양함 괴벤호와 이를 호위하는 경순양함 브레슬라우 호에게 중립국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즉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영국의 지중해 함대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1]
독일 군함들은 영국 함대를 피해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무사히 들어갔다. 이 두 군함은 오스만 제국에 매각되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영국이 자국에서 건조 중이던 전투함 2척을 억류한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괴벤호의 오스만 제국으로의 도주는 11월 초 오스만 제국이 독일을 지원하며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1]
다른 해역에서는 독일 해상 기습 부대가 영국 상선단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10월 중순까지 40척 이상의 영국 및 동맹국 선박을 격침하거나 나포했다. 한편, 영국과 동맹국 해군은 태평양의 독일 기지들을 점령하고, 독일 동아시아 함대가 모항인 칭다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봉쇄했다.[1]
독일 동아시아 함대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슈페 장군은 본국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귀환 도중 11월 1일 칠레 코로넬 근처에서 영국 군함 2척을 격침시켰다(코로넬 해전). 그러나 이후 독일 해군의 행운은 기울기 시작했다. 영국은 기습 공격을 하던 독일 함선 대부분을 추적하여 나포했다. 12월 9일 포클랜드 섬 근해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영국 해군은 슈페의 동아시아 함대를 전멸시켰다(포클랜드 해전).[1]
2. 2. 1915년 ~ 1917년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 제국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를 침공했으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서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서부 전선에서는 양측 모두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지만, 참호, 기관총, 철조망 등으로 인해 방어 측이 유리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15년 조제프 조프르는 누아용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해 아르투아와 샹파뉴에서 협공을 계획했다. 5월 10일 영국군은 뇌브샤펠 전투에서 초반 성공을 거두었으나, 식량 및 통신 부족과 독일군의 반격으로 작전은 실패했다.
1915년 가을, "포커의 징벌"이라 불리는 독일 공군의 공세로 연합군 정찰기는 큰 피해를 입었다. 9월, 연합군은 아르투아 제3차 전투, 샹파뉴 제2차 전투, 루스 전투를 개시했으나, 독일군의 심층 방어에 막혀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12월, 더글러스 헤이그가 존 프렌치를 대신하여 영국군 사령관이 되었다.
1916년에는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가 벌어졌지만,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만 발생하고 전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프랑스를 소모시키기 위해 베르됭을 공격했으나, 프랑스군의 저항과 다른 전선에서의 공세로 인해 공격은 중단되었다.
1917년 11월 20일, 영국군은 캉브레 전투에서 최초로 대규모 전차 공격을 감행하여 성공을 거두었지만, 독일군의 반격으로 다시 후퇴했다.
이처럼 기관포, 독가스, 전차, 비행기 등 신무기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부 전선은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2. 2. 1. 참호전
1914년 말, 마른 전투 제1차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춘 후, 독일군은 에인 강 북쪽에서 참호를 파고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이로써 3년 이상 지속될 서부 전선의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양측은 바다를 향한 경쟁을 통해 참호선을 스위스 국경에서 북해까지 확장했다.[10]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 지역은 프랑스 선철 생산량의 64%, 제철의 24%, 석탄 산업의 40%를 차지하여 프랑스 산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10]
협상국 측에서는 각국 군대가 전선의 일부를 방어하는 형태로 최종 방어선을 점령했다. 벨기에군은 서플랑드르의 35km 길이의 아이제르 전선을, 영국 원정군(BEF)은 그 측면을 담당했다.[10]
1915년 5월, 독일군은 라빌오보아에서 새로운 방어 시스템을 설명하는 프랑스 문서를 획득했다. 이 방어는 요새화된 최전선 대신 일련의 계단식 방어선으로 구성되었다. 최전선은 드문드문 배치된 초소와 강화된 요새, 은폐된 예비대로 이루어졌으며, 경사면이 있는 경우 후방에 병력을 배치하여 방어했다. 사단급 포병 지휘와 방어가 완전히 통합된 이 새로운 방어 체계는 이후 연합군 공격에 대한 유연한 심층 방어 교리의 기반이 되었다.[10]
보주와 해안선 사이, 콩피에뉴 부근 전선에는 누아용이라는 마을 근처에 돌출부가 있었다. 1915년, 조프르는 이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해 양쪽에서 공격하여 독일군을 포위하려 했다.[10] 영국군은 북쪽의 아르투아를, 프랑스군은 샹파뉴를 공격했다.
5월 10일, 영국군은 오베르 산릉을 공격했다. 3km 전선에 4개 사단이 밀집하여 35분간 530문 21만 발의 포격을 가한 후 공격하여 4시간 만에 목표 마을을 점령했다. 그러나 식량과 통신 부족, 독일군의 예비 부대 반격으로 작전은 실패했다. 영국군은 사전 포격으로 포탄 비축량의 3분의 1을 소모했다.[11][12]
독일군은 장기전을 각오하고 동부 전선 공격 계획을 위장하기 위해 이프르에서 공세를 계획했다. 1914년 11월 제1차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큰 피해를 입고 점령한 곳이었다. 2일간의 포격 후 독일군은 영국군 진지에 염소 가스를 살포했다.[13] 질식한 병사들이 패닉에 빠져 6.4km 전선이 붕괴되었으나, 독일군은 큰 진격을 하지 못했고 캐나다군이 전선을 회복했다. 제2차 이프르 전투는 세계 최초의 대규모 독가스전으로, 170톤의 화학 물질이 사용되어 5000명이 수 분 만에 사망했다. 이는 1899년 헤이그 육전 규약 위반이었다.
2일 후 독가스 공격으로 영불군 전선이 4.8km 후퇴했으나, 이후 영불군은 가스 마스크 등 방호 수단을 도입하여 독가스의 효과는 감소했다. 1년 후 율뤼크 전투(Battle of Hulluch)에서 아일랜드 제16사단에 대한 대규모 독가스 공격은 실패했다.
2. 2. 2. 1915년의 주요 전투
1915년 9월, 연합군은 프랑스에서 아르투아 제3차 전투, 샹파뉴 제2차 전투, 그리고 영국의 루스 전투를 포함한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프랑스는 여름 동안 이 작전을 준비했고, 영국은 공격을 위한 프랑스군을 확보하기 위해 더 많은 전선을 장악했다. 9월 22일, 항공 사진을 통해 신중하게 목표물을 정한 포격이 시작되었다.[15] 주요 프랑스 공격은 9월 25일에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철조망과 기관총 진지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후퇴하는 대신 최대 약 8.05km 깊이의 일련의 방어 구역과 진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심층 방어 계획을 채택했다.
9월 25일, 영국은 아르투아 제3차 전투의 일환으로 루스 전투를 시작했는데, 이는 더 큰 샹파뉴 공격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공격은 25만 발의 포탄과 5,100개의 염소 가스 실린더 투하라는 4일간의 포격으로 시작되었다.[11] 이 공격에는 주요 공격에 참여한 2개 군단과 이프르에서 우회 공격을 수행한 2개 군단이 포함되었다. 영국군은 공격 중 기관총 사격으로 인해 특히 큰 손실을 입었고, 포탄이 부족해지기 전까지 제한적인 이득만 거두었다. 10월 13일 공격 재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2] 12월에는 존 프렌치 장군을 대신하여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이 영국군 사령관이 되었다.
보주와 해안선 사이, 콩피에뉴 부근 전선에는 누아용이라는 마을 근처에 돌출부가 있었다. 1915년에 들어 조제프 조프르는 이 돌출부를 제거할 목적으로 양쪽에서 공격하여 독일군을 포위하려고 시도했다.[10] 영국군은 북쪽의 아르투아를, 프랑스군은 샹파뉴를 공격하게 되었다.
5월 10일 영국군의 공격에서는 오베르 산릉(Aubers Ridge)을 둘러싼 뇌브샤펠 전투가 발생했다. 3km 전선에 4개 사단이 밀집하여 공격한 영국군은 530문 21만 발의 격렬한 포격을 35분간 가한 후 보병 돌격을 개시했고, 4시간 후 목표 마을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공격은 식량과 통신 부족으로 인해 순조롭지 못했다. 독일군은 예비 부대를 투입하여 반격에 나섰다. 영국군은 사전 포격으로 포탄 비축량의 3분의 1을 소모했기 때문에,[11] 존 프렌치 장군은 최초 공격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작전 실패의 원인을 그것에 돌리고 있다.[12]
독일군은 방어 측의 유리함을 인지하고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동부 전선에서의 공격 계획을 위장하는 명목으로 벨기에의 작은 마을 이프르 부근에서의 공세를 계획했다. 이 마을은 1914년 11월에 있었던 제1차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점령한 곳이었다. 2일간의 포격 후 독일군 진지에서 영국군 진지가 위치한 풍하 쪽으로 염소 가스가 살포되었다.[13] 황록색 가스로 인해 질식 상태가 된 병사들은 패닉에 빠져 약 6.44km에 걸친 전선이 붕괴되었다. 이러한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던 독일군은 눈에 띄는 진격을 하지 않았고, 캐나다군이 전선에 도착함으로써 원래의 전선은 회복되었다. 제2차 이프르 전투는 세계 최초의 대규모 독가스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70톤의 화학 물질이 사용되었고, 5000명의 병사가 수 분 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독가스 사용은 1899년에 제정된 헤이그 육전 규약 위반이었다.
2일 후에도 독가스 사용이 반복되었고, 이때는 약 4.83km의 영불군 전선이 후퇴했다. 이후 영불군은 가스 마스크 등의 방호 수단을 도입했기 때문에 독가스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1년 후인 4월 27일 이프르에서 40km 남쪽에서 발생한 헐러크 전투에서는 아일랜드 제16사단에 대한 대규모 독가스 공격이 있었지만,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1915년 봄 연합군의 마지막 공세는 비미 고지(Vimy Ridge)를 목표로 한 제2차 아르투아 전투였다. 프랑스 제10군이 5월 9일 6일간의 사전 포격 후 공격을 개시하여 5km 전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기관총 진지를 강화한 뒤 포격을 개시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프랑스군은 15일 공격을 중지했다.
1915년 가을에는 "포커의 징벌"이라고 불리는 독일 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어 연합군의 모든 정찰기가 전선 부근에서 격추되었다. 정찰기는 포격 평가와 참호의 항공 사진 촬영에 이용되었지만, 프로펠러와 기관총의 동조 장치를 갖춘 독일기에 전혀 대항할 수 없었다.[14]
1915년 9월 연합군은 제2차 샹파뉴 전투라고 불리는 공격을 감행했다. 여름 내내 프랑스군은 이 공격을 준비했고, 영국군은 프랑스군과의 공동 체제를 완화하여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사전 포격의 목표는 항공 사진으로 결정되었다.[15] 공격은 9월 22일에 시작되었다. 보병의 돌격은 25일에 이루어졌고, 어느 정도 전진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공격을 예상한 독일군은 전선 후방에 3km에서 6km에 이르는 심층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월말이 되자 프랑스군의 공격은 좌절되었다.
9월 25일, 영국군은 루스 전투를 개시했다. 4일간의 사전 포격으로 25만 발의 포탄과 5,100발의 염소 가스탄이 소모되었다. 공격에는 2개 군단이 공격 전면에, 또 다른 2개 군단이 이프르에서의 측면 지원에 사용되었다. 영국군은 기관총 공격으로 인한 큰 피해를 입었고, 그 결과는 거의 없었다. 10월 13일 공격에서는 다소 개선되었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결과는 아니었다. 샹티이에서 열린 연합군 각국 회의(1915년 12월 6일 - 12월 8일) 후, 12월 10일에 영국군 사령관 존 프렌치가 경질되고 더글러스 헤이그가 후임이 되었다.
2. 2. 3. 1916년의 주요 전투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돌파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대신 대규모 사상자를 유발하여 프랑스를 궤멸시키는 데 집중했다.[16] 그의 새로운 목표는 "프랑스를 피로 녹초로 만들 것"이었다.[17] 이를 위해 그는 두 가지 전략을 채택했다. 첫 번째는 해외에서 도착하는 협상국의 보급품을 차단하기 위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었다.[16] 두 번째는 최대한 많은 사상자를 유발하기 위한 프랑스군에 대한 공격이었다. 팔켄하인은 전략 및 국가적 자부심 때문에 프랑스가 후퇴할 수 없는 지점을 공격하여 프랑스군을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 베르됭이 이에 적합한 곳으로 선택되었는데, 그 이유는 베르됭이 중요한 요새이며, 요새들이 고리처럼 둘러싸여 있고, 독일군 전선 근처에 위치해 있으며, 파리로 가는 직통로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16]
팔켄하인은 포병 화력을 집중시키고 반격으로부터 돌파를 막기 위해 전선의 크기를 약 4.83km에서 약 6.44km로 제한했다. 그는 또한 주요 예비군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전투를 지속하기에 충분한 병력만 투입했다.[16] 공격을 준비하면서 독일군은 요새 근처에 항공기를 집중 배치했다. 개전 초기, 독일군은 프랑스 항공기를 몰아내어 독일군 포병 관측기와 폭격기가 방해 없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5월에 프랑스는 우수한 뉴폴 전투기를 보유한 ''에스카드릴 드 샤세''(escadrilles de chasse)를 배치하여 맞섰고, 베르됭 상공은 양측이 공중 우세를 위해 싸우면서 전장으로 변모했다.[17]
폭설로 인한 9일간의 지연 끝에, 베르됭 전투는 1916년 2월 21일에 시작되었다. 격렬한 8시간의 사전 포격 후 독일군은 베르됭 요새 주변에 배치된 요새 집단에 접근했다.[18] 화염방사기 등을 사용한 독일군에 대해 프랑스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Fort Douaumont|두아몽 요새프랑스어가 점령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에 증원이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2월 28일에는 독일군의 공격이 둔화되었다.
독일군은 목표를 르 모르톰 고지(Cumières-le-Mort-Homme프랑스어)로 전환하여 5월에 이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이프리트 가스 등을 사용하여 6월 7일에 Fort Vaux|보 요새영어를 함락시키고 베르됭에서 1km 지점까지 접근했지만, 브루실로프 공세(6월 4일, 러시아군), 솜 전투(7월 1일, 영국군), 제6차 이존조 전투(8월 6일, 이탈리아군) 등 다른 전선에서의 공세로 인해 공격을 중단했다.
여름 동안 이동탄막 사격에 숙달된 프랑스군이 조금씩 전진하여 1916년 12월에 보 요새를 탈환했다.
2. 2. 4. 1917년의 주요 전투
1917년 11월 20일, 영국군은 캉브레 전투에서 최초로 대규모 전차 공격을 감행했다.[27] 연합군은 324대의 전차와 12개 사단으로 독일군 2개 사단을 공격했다. 전차는 참호를 넘기 위해 전면에 나뭇가지 다발을 싣고, 4m 폭의 독일군 전차 저지선을 넘었다. 특수 "갈고리 전차"는 갈고리로 독일군 철조망을 제거했다. 이 공격은 영국군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주었으며, 4개월간 이어진 제3차 이프르 전투보다 6시간 만에 더 깊숙이 진입했다.[27]
그러나 이 전진은 돌출부를 만들었고, 11월 30일 독일군의 기습적인 반격으로 영국군은 남쪽에서 후퇴했다. 역전에도 불구하고, 이 공격은 전차가 참호 방어를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전차 사용이 새로운 위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전투에서는 또한 독일군 ''돌격군(Stosstruppen)''이 대규모로 사용되어, 보병 잠입 전술로 영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후방으로 진격했다.[27]
2. 2. 5. 항공전
1915년에 공중전을 위한 특수 비행기가 도입되었다. 이미 정찰에 항공기가 사용되고 있었고, 4월 1일 프랑스 조종사 롤랑 가로가 프로펠러 날개를 통과하여 앞으로 발사되는 기관총을 사용하여 적기를 격추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이는 날개를 조잡하게 강화하여 총알을 빗나가도록 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14] 몇 주 후 가로는 독일군 진영 뒤에 불시착했다. 그의 비행기는 압수되어 네덜란드의 엔지니어 안토니 포커에게 보내졌고, 그는 곧 기관총이 프로펠러 회전과 동기화되어 프로펠러 날개가 사격선에서 벗어날 때 발사되는 차단 장치라는 중요한 개선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발전은 포커 E.I(Eindecker, 또는 단엽기, Mark 1)에서 신속하게 실전 배치되었는데, 이는 적절한 최대 속도와 효과적인 무장을 결합한 최초의 단좌 전투기였다. 막스 이멜만은 8월 1일에 'Einde커'로 최초로 확인된 격추를 기록했다.[14]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양측은 개량된 무기, 엔진, 항공기 골격 및 자재를 개발했다. 또한 에이스 신화를 낳았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붉은 남작)이다. 신화와는 달리 대공포 사격이 전투기보다 더 많은 격추를 기록했다.
1915년 가을, "포커의 징벌"이라고 불리는 독일 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어 연합군의 모든 정찰기가 전선 부근에서 격추되었다. 정찰기는 포격 평가와 참호의 항공 사진 촬영에 이용되었지만, 프로펠러와 기관총의 동조 장치를 갖춘 독일기에 전혀 대항할 수 없었다.[14]
베르됭에서의 공중전을 연구한 프랑스군은 새로운 전투기를 솜므 전투에 도입했다. 연합군은 솜므에서의 제공권 확보에 성공했고, 이에 따라 독일군은 개인적인 기량에 의존했던 공중전 기술에서 팀을 구성한 집단전 기술로 개혁하기 시작했다.[20]
2. 2. 6. 화학전
독일군은 방어 측의 유리함을 인지하고 장기전을 각오했지만, 동부 전선에서의 공격 계획을 위장한다는 명목으로 벨기에 이프르 부근에서 공세를 계획했다. 이 지역은 1914년 11월 제1차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점령한 곳이었다. 2일간의 포격 후, 독일군은 영국군 진지 쪽으로 염소 가스를 살포했다.[13] 황록색 가스는 질식을 유발했고, 패닉에 빠진 병사들로 인해 6.4km에 걸친 전선이 붕괴되었다. 독일군은 이러한 성공을 예상하지 못해 눈에 띄는 진격을 하지는 못했고, 캐나다군이 전선에 도착하면서 전선은 회복되었다. 제2차 이프르 전투는 세계 최초의 대규모 독가스전으로 기록되었으며, 170톤의 화학 물질이 사용되어 5,000명의 병사가 수 분 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독가스 사용은 1899년 헤이그 육전 규약 위반이었다.
2일 후에도 독가스가 사용되어 4.8km의 영불군 전선이 후퇴했다. 그러나 이후 영불군은 가스 마스크 등 방호 수단을 도입하여 독가스의 효과는 감소했다. 1년 후인 1916년 4월 27일, 이프르에서 40km 남쪽에서 벌어진 에서는 아일랜드 제16사단에 대한 대규모 독가스 공격이 있었지만 실패했다.
2. 3. 1918년
1918년 독일 제국은 춘계 대공세(카이저슐라흐트) 실패와 미국군의 참전으로 연합군에 비해 전력적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독일군 사령부는 패배를 인식하고, 같은 해 11월 독일 정부는 휴전 협정을 수락했다.
1918년 3월 21일, 독일군은 1918년 춘계 공세의 일환으로 미하엘 작전을 개시하여 아미앵의 철도 요충지를 공격했다. 이 공세에서 독일군은 60km 전진하며 파리에서 120km 이내까지 접근했다. 크루프사의 파리포가 파리에 포격을 가했고, 많은 시민들이 도시를 떠났다. 그러나 독일군은 보급 부족과 병력 소모로 인해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
독일군의 공세에 대응하여 연합군은 3월 26일 두랭 회의에서 통합 지휘 체계를 구축하고 페르디낭 포슈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포슈의 지휘 아래 연합군은 제2차 마른 전투에서 반격하여 독일군의 돌출부를 제거했다. 이후 아미앵 전투에서 연합군은 대규모 전차 부대와 항공 지원을 바탕으로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이 날을 "독일 육군의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
9월에는 존 퍼싱이 이끄는 50만 명 이상의 미군이 생미셸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어서 9월 26일에는 뫼즈-아르곤느 공세가 시작되어 미군 26만 명이 힌덴부르크 방어선을 공격했다.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제79사단이 몽포콩다르곤에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작전에 차질이 빚어졌다. 10월 1일, 루덴도르프는 힌덴부르크에게 전멸 또는 휴전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후자를 제안했다.
1917년 6월부터 미국 원정군(AEF)이 프랑스에 도착하여 연합군의 사기를 높였다. 1918년 5월, 미국 원정군(AEF)은 캉티니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고, 여름까지 매달 30만 명의 병력이 미국에서 수송되었다. 총 210만 명의 미군 참전은 서부 전선의 전력 균형을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바꾸었다.
독일 혁명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1918년 11월 11일에 휴전이 성립되었다.[31] 다른 전선에서는 독일군이 계속 승리하고 있었지만, 서부 전선의 붕괴로 인해 11월 11일 독일 정부는 휴전 협정을 수락했다.
2. 3. 1. 독일군의 춘계 공세
1918년 3월 21일, 1918년 춘계 공세의 서막인 미하엘 작전[29]이 발동되어 아미앵의 철도 요충지에 대한 영국군 공격이 시작되었다. 루덴도르프의 목표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독일 최초의 전차 A7V도 최초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참호는 침투 작전에 의해 돌파되었다. 이전까지 전형적인 참호 공격은 장거리포 포격과 지속적인 전선에서의 대규모 공격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공세에서 독일군은 단시간 포격을 실시하고 약점에 보병을 침투시켜 사령부와 보급 지역, 강력한 저항 거점 주변 지역을 공격했다. 이렇게 고립된 거점은 중무장한 보병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공세에서 독일군은 60km라는 전례 없는 전진을 달성했는데, 이는 1914년 이후 처음이었다.
전선은 파리에서 120km 이내로 이동했다. 3문의 크루프 제작 초대형 열차포인 파리포가 파리에 183발의 포탄을 발사하여 많은 시민들이 파리에서 대피했다. 빌헬름 2세는 3월 24일을 국민 축일로 선포했고, 많은 독일인들이 승리가 가까워졌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보급 부족과 소모로 인해 독일의 공격은 멈추었다. 1918년 3월부터 4월까지 독일군의 사상자는 27만 명에 달했다.
독일군의 공세를 받자, 3월 26일 두랭 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 양군은 지휘 체계 통일에 동의하고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총사령관에는 페르디낭 포슈가 임명되었다. 영국의 육군 원수 더글러스 헤이그는 포슈에게 그의 군대 지휘를 맡겼다. 포슈의 교묘한 전선 재구축으로 루덴도르프가 의도했던 돌파 가능성은 소멸하고, 종래와 마찬가지로 소모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 후 독일군의 뷔르히어-요크 작전이 파리를 향해 남쪽으로 실시되었다.
2. 3. 2. 연합군의 반격
독일군의 공격으로 마른 부근에 형성된 돌출부에 대해 포슈는 공격을 기획했고, 7월에 제2차 마른 전투가 시작되었다. 연합군의 공세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고, 8월에는 돌출부가 해소되었다.[30]
이 전투가 끝난 2일 후인 8월 8일에는 아미앵 전투가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마크 4와 마크 5형 전차 414대와 비행기 800대, 병력 12만 명을 동원하여 불과 7시간 만에 독일군 점령지 안으로 12km 진입했다.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전 전선에서 돌파에 성공했고, 루덴도르프는 8월 8일을 독일 육군의 암흑의 날이라고 칭하게 되었다.[30] 그러나 며칠 후 공세는 속도가 늦어졌다. 영국군의 전차 414대 중 7대를 제외한 모든 전차에 문제가 발생했다. 1918년 8월 15일, 헤이그는 공세의 종료를 선언하고, 알베르에서의 공세를 예상하여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공격은 8월 21일에 시작되었다(알베르 전투). 미군 병사 약 13만 명이 영국 제3군, 제4군 병사들과 함께 전진했다(제2차 솜 전투). 그 공격은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독일 제2군은 55km 뒤로 밀려났다. 바파움 마을은 8월 29일에 함락되었고(제2차 바파움 전투) 9월 2일까지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방어선까지 후퇴했다.
9월이 되자 존 퍼싱이 이끄는 미군 원정군 50만 명 이상이 투입된 생미셸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미군 원정군 10개 사단을 이용하여 힌덴부르크 방어선을 점령하려는 시도(뫼즈-아르곤느 공세로 알려짐)가 9월 26일에 시작되었다. 미군 병사 26만 명이 힌덴부르크 방어선을 향해 돌격했다. 미군 원정군 79th Infantry Division (United States)|미국 제79사단|제79사단영어을 제외한 모든 사단은 초기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제79사단은 Montfaucon-d'Argonne|몽포콩다르곤|몽포콩프랑스어에서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여 전진이 불가능했다. 이 실패가 독일군에게 회복과 재편성의 기회를 주었다. 몽포콩은 9월 27일에 함락되었지만, 전날 함락시키지 못한 실패가 전반적인 작전에서 가장 큰 손실 중 하나였다.
10월 초까지는 독일 측에 있어서 상황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많은 전차가 한 번 이상 고장 났고, 실제로 사용 가능했던 전차들도 지형이 전차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전차 지휘관이 전차를 파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덴도르프는 10월 1일까지 독일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결정했다. 즉, 전멸이거나 휴전이었다. 그는 바로 그날 벨기에 스파에서 열린 회담에서 힌덴부르크에게 후자를 제안했다. 퍼싱은 10월 내내 지친 독일군을 뫼즈-아르곤느 전선을 따라 계속 공격했다.
2. 3. 3. 미국 원정군의 참전
1917년 6월 25일, 최초의 미군 부대가 프랑스에 도착하여 미국 원정군(AEF)을 편성하기 시작했다.[28] 그러나 미군 부대는 10월까지 사단급 병력으로 참호전에 투입되지 않았다.[28] 신병들은 전투에 참여하기 전에 훈련과 장비를 갖춰야 했고, 몇 달 동안 미군 부대는 지원 활동에 배치되었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존재는 연합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추가적인 증원군이 연합군의 병력 균형을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28]
1918년 5월, 미국 원정군(AEF) 사단이 처음으로 전선에 투입되어 캉티니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여름까지 매달 30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미국에서 수송되었다. 총 병력 210만 명에 달하는 미군의 등장은 그때까지 균형을 유지하던 서부 전선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2. 3. 4. 종전
독일 혁명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1918년 11월 11일에 휴전이 성립되었다.[31] 다른 전선에서는 독일군이 계속 승리하고 있었지만, 서부 전선의 붕괴로 인해 11월 11일 독일 정부는 휴전 협정을 수락했다.
3. 참전국
3. 1. 동맹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동맹국에 속했다.
3. 2. 연합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미국, 포르투갈, 캐나다, 루마니아가 연합국에 속했다.[1]
러시아 제국, 세르비아 왕국 군대의 일부도 이 전선에 참전했다.[2] 일본 제국과 시암, 중화민국은 장군 몇 명만 서부 전선에 파견했다.[2]